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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영국스러운 추리소설 <영국식 살인>

by 하양 고양이 2025. 7. 1.

영국식 살인 표지 이미지
<영국식 살인> 표지 이미지입니다.

 

 

영국 사회가 처한 정치적 혼란과 계급 갈등을 추리소설로 그려낸 작품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에서는 영국 귀족에 대한 환상이 있습니다. 일본 만화책에서 많이 나오는 집사나 메이드도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영국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영국식 살인>을 보며 영국의 계급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알게 되었습니다. 멋진 귀족이나 충직한 집사, 아름다운 메이드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현실감을 되찾게 해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계급 구조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계급의 이면에 있는 보수성을 드러내는 소설이기도 합니다.

<영국식 살인(An English Murder)>은 시릴 헤어(Cyril Hare)가 1951년에 발표한 고전 미스터리 소설로, ‘하우스 미스터리’라는 장르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정치적, 사회적 풍자 요소를 강하게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야기는 영국 시골의 외딴 대저택인 워링엄 성을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눈 덮인 겨울날, 워링엄 성에는 귀족 가문 구성원들과 몇몇 손님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들은 노쇠한 루드빅 경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기 위해 초대받은 인물들입니다.
이 모임은 표면적으로는 화목한 가족행사처럼 보이지만, 참석자들 사이에는 복잡한 정치적 신념과 과거의 감정, 숨겨진 갈등이 얽혀 있습니다. 등장인물 중에는 급진 사회주의자부터 극우파, 정치 엘리트, 외국인 교수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들 각각은 루드빅 경의 유산과 관련된 이해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사건은 저녁 식사 후 벌어지는 살인으로 시작됩니다. 피해자는 레오나드 워링턴 경의 후계자로, 우익 정치인인 로버트 워링턴입니다. 그는 독살되었고, 사건은 폐쇄된 공간 내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용의자는 대저택 안에 있는 사람들 중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수사를 맡게 된 인물은 평범하지만 집요한 시골 경찰 브라운 경감과, 비공식적으로 협력하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박식한 역사학자 도널드 브루넬 박사입니다. 브루넬 박사는 사회적 통찰과 논리를 바탕으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 나갑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추리소설을 넘어 당시 영국 사회가 처한 정치적 혼란과 계급 갈등, 유럽에서 들이닥친 전체주의의 그림자를 날카롭게 조명합니다. <영국식 살인>은 살인의 동기가 단지 개인적인 분노나 탐욕이 아니라, 시대적 이념 갈등과 불안정한 정치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에 밝혀지는 범인의 정체는 충격을 주며, 인간의 이념이 어떻게 폭력으로 비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서늘한 메시지를 남깁니다.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로서 몰입도와 완성도를 갖춘 작품

독자들은 <영국식 살인(An English Murder)>을 전통적인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로서 뛰어난 몰입감과 완성도를 갖춘 작품으로 평가합니다. 눈 내리는 외딴 성, 귀족 가문과 초대 손님들, 그리고 크리스마스라는 배경은 아가사 크리스티를 연상케 하지만, 이 작품은 보다 정치적이고 사회학적인 접근으로 차별화를 이룹니다. 많은 독자들은 작가가 단순한 ‘범인 찾기’에 그치지 않고, 시대와 계급, 이념을 범죄의 배경으로 삼은 점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특히 주인공격인 브루넬 박사에 대한 호감이 높습니다. 그는 탐정이 아니면서도 뛰어난 관찰력과 논리력으로 사건의 진실을 파악하며, 외국인이라는 시선을 통해 영국 상류 사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봅니다. 이와 동시에 사회의 모순과 편견을 지적하며, 독자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또한 시골 경찰 브라운 경감의 소박하고 현실적인 수사 방식 역시 현실감을 더하며, 두 사람의 협력 구도는 인간적인 매력을 보여줍니다.
독자들 사이에서는 작품의 미스터리 요소도 충분히 만족스럽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동기와 트릭이 단순하지만 설득력 있고, 의심스러운 인물들 각각에게 의심할 만한 동기가 부여되어 있어 흥미롭게 전개됩니다. 일부 독자들은 작품의 정치적 언급이 다소 직접적이고 무겁게 느껴질 수 있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조차도 이 작품의 시대 배경과 주제를 고려할 때 의미 있는 요소라고 받아들입니다. 전반적으로 <영국식 살인>은 미스터리를 즐기는 독자뿐만 아니라, 영국 현대사와 계급 사회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도 높은 만족감을 주는 작품입니다.

평론가들은 <영국식 살인(An English Murder)>을 20세기 중반 영국 미스터리 소설 중 가장 사회적 의미가 뚜렷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합니다. 일반적인 '하우스 미스터리'가 가족 간의 갈등이나 개인적 복수에 집중하는 반면, 이 작품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정치적 이념 충돌과 계급 간 긴장을 사건의 주요 원인으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문학적 깊이를 인정받습니다. 특히 전후 영국의 혼란한 정치 상황과 귀족 체제의 몰락, 파시즘의 확산 같은 요소들을 능숙하게 소설적 장치로 녹여낸 점이 주목됩니다.
영국 문학 평론가 줄리안 심스(Julian Symons)는 이 작품에 대해 “정통 미스터리의 형식을 차용하면서도 시대정신을 반영한 보기 드문 예”라고 평가하며, 브루넬 박사라는 캐릭터를 통해 외부자의 시선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고 분석합니다. 브루넬 박사는 수사 그 자체보다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읽어내는 인물로, 사건 해결이라는 미스터리적 구조 안에 정치적 메시지를 녹여냅니다.
평론가들은 이 작품의 최대 강점을 '균형 잡힌 구성'으로 봅니다. 트릭이나 반전은 전통적인 미스터리의 규범을 따르되, 그 위에 시대 배경과 계급 갈등이라는 현대적인 요소를 자연스럽게 결합합니다. 또한, 인물 설정이 단순한 전형을 넘어서, 각자의 이념과 경험을 바탕으로 행동하는 점에서 깊이 있는 서사가 만들어집니다.
한편, 일부 보수적인 평론가들은 작품의 정치색이 강해 본연의 추리 재미를 저해한다고 보기도 하지만, 다수의 평론가들은 그것이 오히려 작품을 시대적 맥락 속에서 더 돋보이게 만든다고 반박합니다. <영국식 살인>은 단순한 ‘범죄 해결’ 이상의 의미를 지닌 소설로, 추리소설의 틀 안에서도 사회적 분석과 철학적 질문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꼽힙니다.

 


법과 윤리 사이의 경계를 질문하는 작가, 시릴 헤어

시릴 헤어(Cyril Hare)는 영국의 판사이자 추리소설 작가로, 본명은 앨프리드 알렉산더 고든 클라크(Alfred Alexander Gordon Clark)입니다. 1900년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 뉴칼리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이후 변호사와 판사로 활동하며 탄탄한 법조 경력을 쌓았습니다. 그는 법조인의 이력을 바탕으로, 작품 속에서 법과 정의의 관계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시릴 헤어의 대표작으로는 <영국식 살인(An English Murder)> 외에도 <처형대에서의 죽음(Tragedy at Law)>, <그림자의 발자국(With a Bare Bodkin)>, <법정의 미로(He Should Have Died Hereafter)> 등이 있으며, 특히 <처형대에서의 죽음(Tragedy at Law)>은 영국 법조계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법정 미스터리의 고전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시릴 헤어 본인이 경험한 순회 재판의 풍경과 법정 절차를 생생하게 재현하여, 추리소설과 법률 드라마를 결합한 걸작으로 평가받습니다.
시릴 헤어는 194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인 창작 활동을 시작했으며, 평생 동안 일곱 편의 장편 소설과 다수의 단편을 남겼습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법과 질서, 인간의 정의감과 모순을 추리적 구조 안에 담아냄으로써, 전통 미스터리 작가들과는 다른 차원의 사회적 통찰력을 보여줍니다. 그는 추리소설을 통해 영국 사회의 계급, 권력, 정의의 의미를 비판적 시선으로 조명하며, 법과 윤리 사이의 경계를 질문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시릴 헤어는 1958년 심장질환으로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망했지만,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지적이고 도덕적인 추리소설’의 전범으로 꼽히며 꾸준히 재출간되고 있습니다. 특히 <영국식 살인>은 전후 영국의 정치적 불안과 계급 해체를 반영한 걸작으로, 사회와 미스터리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