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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남긴 공간의 기억에 찾은 공포, <잔예>

by 하양 고양이 2025. 7. 7.

잔예 표지 이미지
<잔예> 표지 이미지입니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공포의 흔적에 대한 두려움을 주는 소설

공포란 무엇일까요? 저는 공포란 '알 수 없는 무언가'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아직 야생에서 살고 있던 시대부터, '알 수 없는 무언가'는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공포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공포라는 감각을 못 느꼈다면, 처음 보는 '알 수 없는 존재' (독뱀일수도, 독초이거나, 사람을 잡아먹는 야수일수도 있겠죠)에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험이 우리 유전자에도 남아 지금 인간이 느끼는 공포라는 감정의 기초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잔예> 정말 오싹한 소설입니다. 제가 읽은 공포소설 중 최상위의 공포감을 선사해 주는 소설이라 생각합니다. 보통 원한을 가진 귀신이 나오고, 그 원한을 풀어주면 해결되는 한국식 귀신 이야기와 달리, 일본의 괴담이나 공포소설은 귀신과 같은 이상현상이 발생하는 원인을 모릅니다. 설령 원인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 원인을 해결해도 공포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인간과는 상관없는 초월적인 무언가로 다루고 있죠. <잔예>는 이런 일본 공포문학 중에서도 인간의 무기력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오노 후유미는 <십이국기>로 국내에 많은 팬을 가지고 있는 소설가입니다. 저도 정말 좋아하는 소설이라, 언젠가 <십이국기>를 소개해보고 싶습니다. 

오노 후유미(小野不由美)의 <잔예(殘穢/ざんえ)>는 공포 소설이라는 장르 안에서도 독특한 결을 지닌 작품으로, 실제 사건과 허구가 정교하게 얽혀 있는 형식을 취합니다. 작품은 한 작가가 독자로부터 받은 편지를 계기로 수상한 집과 그 집에서 발생한 기이한 사건들에 관심을 갖게 되며 시작됩니다. 이 작가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소설은 독자와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논픽션풍 허구’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 듯한 문체와 세밀한 자료 조사, 다큐멘터리 형식을 차용한 전개 방식은 독자에게 사실성과 긴장감을 극대화하여 전달합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작가에게 도착한 한 여성 독자의 편지로부터 출발합니다. 편지의 내용은 자신이 거주하는 집에서 계속해서 들리는 기묘한 ‘소리’에 대한 불안과 질문이 담겨 있으며, 이에 흥미를 느낀 작가는 해당 집에 얽힌 배경을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그 집의 과거 세입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하나의 집, 하나의 공간이 아닌, 전체 지역, 나아가 일본 전역에 걸쳐 뻗어 있는 ‘불길한 인연의 고리’가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이 책은 단순히 귀신이 출몰하거나 공포스러운 장면이 나오는 전통적인 공포물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공포의 실체는 눈앞에 보이는 귀신이나 유령이 아니라, 장소와 사람, 과거의 사건들이 만들어낸 ‘잔재’, 즉 찌꺼기처럼 남아 있는 정서와 기운입니다. ‘잔예(殘穢)’란 본래 '깨끗하지 않은 기운이 남아 있는 상태'를 의미하며, 이 책의 제목이자 전체 내용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입니다.
조사 과정에서 작가와 동료 작가, 취재진은 일본 각지의 사건들, 예컨대 가족 몰살, 집단 자살, 원인불명의 죽음, 기묘한 소리와 감지되지 않는 기운 등을 따라가며 그 기원과 연관성을 추적합니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사건들은 하나의 오래된 사건과 땅의 역사, 그곳에서 살아갔던 사람들의 행적과 연결되며,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정신적 오염’의 고리가 밝혀집니다.
<잔예>는 심령현상보다 더 깊이 있는 ‘공간의 기억’과 ‘사람이 남긴 감정의 흔적’에 주목합니다. 단순히 소름 끼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이질감과 공포를 섬세하게 묘사함으로써, 독자가 직접 그 분위기 속에 들어가는 듯한 경험을 하게 만듭니다. 마지막까지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여운을 남기며,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체험을 제공합니다.

 


공간에 남은 '잔예'를 공포로 만든 작품

<잔예(殘穢)>는 일본 공포문학의 독보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귀신이나 괴담 중심의 공포물과는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해 독자층 역시 호러 장르 팬뿐 아니라 문학적 깊이를 선호하는 독자들까지 포괄합니다. 오노 후유미는 이 작품을 통해 ‘무서움’의 본질을 정면으로 탐구하며, 공포의 근원이 반드시 비주얼적인 존재일 필요는 없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잔예>가 지닌 가장 큰 강점은, 그 무서움이 시각적 자극이나 극단적인 설정이 아닌 ‘지속적이고 축적된 기운’에서 비롯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일본 문화에서 오랫동안 존재해 온 ‘터(場)의 기운’에 대한 믿음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특정 장소에 부정적인 에너지가 축적되면, 그것이 이후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 전통이 있으며, <잔예>는 이를 문학적 구조 속에 정교하게 녹여냅니다.
또한 이 소설은 철저한 리서치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실제 있는 장소나 인물, 사건 등을 모티브로 삼아 현실감과 몰입도를 극대화합니다. 독자는 책을 읽는 동안 허구인지 현실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혼란 속에 빠지게 되며, 이는 일반적인 소설에서 느낄 수 없는 고유한 긴장감으로 작용합니다. 작중 화자도 실제 작가라는 점에서 ‘작가의 자전적 체험’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이야기의 신뢰도와 실감이 높아집니다.
<잔예>는 또한 서사적으로도 매우 밀도 높은 구성을 보여줍니다. 단순한 플롯이 아닌, 점점 확장되어 가는 조사와 연결고리,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독자는 ‘왜 이 집에서는 계속해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 과정은 단순히 독자의 공포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와 기억, 장소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공포라는 장르적 특성을 빌리면서도 인간과 사회, 역사, 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깊이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비판적으로 바라보자면, <잔예>는 빠른 전개를 선호하는 독자에게는 다소 느릿하게 느껴질 수 있으며, 명확한 결말이나 공포의 실체를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답답하게 느껴질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불완전성’이 이 소설의 미덕이기도 합니다.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 미스터리는 더욱 오래 남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읽은 후에도 오랫동안 여운을 남깁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잔예>는 공포소설을 뛰어넘어 ‘기억의 문학’, ‘공간의 정서’를 탐구하는 문학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오노 후유미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은 ‘귀신’이 아니라, 그 귀신을 만들어낸 사회와 역사, 그리고 인간 자신이라는 근본적인 메시지를 조용하면서도 무섭게 전하고 있습니다.

 


공포와 판타지, 일본 장르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오노 후유미

오노 후유미(小野不由美, おの ふゆみ)는 일본 현대문학과 장르문학 양쪽에서 모두 뛰어난 성과를 이룬 여성 작가입니다. 1960년 일본 오이타현에서 태어난 그녀는 오오타니 대학 불교학과를 졸업한 뒤, 문예창작을 전공하며 꾸준히 글을 써 왔습니다. 특히 판타지, 미스터리, 공포 등 다양한 장르에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치며 독자층을 넓혀 왔습니다.
오노 후유미는 1988년 <마스크의 저주>라는 작품으로 데뷔한 이후, 일본 라이트노벨계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십이국기(十二国記)> 시리즈였습니다. 이 시리즈는 일본에서 방송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될 만큼 인기를 끌었으며, 깊은 세계관과 철학적인 주제 의식으로 판타지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녀의 작품 세계는 장르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유연성과, 인간 내면에 대한 치밀한 통찰이 특징입니다. 공포소설에서는 단순한 귀신이나 괴담보다는 인간 심리와 사회적 맥락, 공간과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을 중시하며, 이는 <잔예>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오노 후유미는 전통적인 일본 괴담의 분위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도,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진지함을 잃지 않습니다.
또한 그녀는 꾸준한 리서치와 취재를 바탕으로 한 사실적인 묘사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잔예>를 집필할 당시에도 실제 장소를 방문하고, 다양한 사례를 취합하며 이야기의 사실성을 높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집요함은 그녀의 작품이 갖는 무게감과 신뢰도를 강화시키며, 독자에게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공포를 안겨줍니다.
오노 후유미의 문체는 간결하면서도 묵직하며, 감정을 과도하게 드러내지 않고도 독자의 정서를 건드리는 힘이 있습니다. 이는 독자 스스로 이야기를 체험하고 해석하도록 여백을 주는 방식으로, 대중성과 문학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독자에게 철학적 사유와 정서적 반응을 유도하는 문학적 깊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현재 오노 후유미는 비교적 작품 활동을 줄이고 있지만, <십이국기>와 <잔예> 등의 대표작을 통해 일본 현대 장르문학의 중요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일본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번역되어 읽히고 있으며, 다양한 언어와 문화권에서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인간, 사회, 역사, 공간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유효하며, 앞으로도 많은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줄 것으로 기대됩니다.